[김혜경 칼럼] 동백 아가씨

어디선가 갑자기 음악 소리가 들렸다. 이때 즈음이면 간식 후 할머니들이 잠시 눈을 붙이는 시간, 웬 소란인가 싶어 복도를 둘러보니 윤 할머니 방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할머니 세 분이 창밖을 바라보며 노래를 듣고 있었다. 가수 이미자 씨가 부른 <동백 아가씨>였다.

방으로 들어서는 나를 본 린다 할머니가 저기 좀 보라는 손짓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어머나! 어느새 동백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계속되는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다니느라 뜨락을 살펴볼 겨를도 없이 지나쳤었는데, 마치 “날 좀 보소.” 하는 듯 동백꽃이 할머니 방 창문 쪽을 향해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제야 아침결에 순이 할머니가 핸드폰을 내밀면서 유튜브에서 노래 찾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던 까닭이 이해가 되었다.

노래 <동백 아가씨>는 내가 태어나서 최초로 배웠던 대중가요였다. 엄마의 후일담에 따르면, 내게 이 노래를 가르쳐 준 사람은 엄마였다. 어릴 적부터 교회 성가대 솔리스트였던 엄마는 찬송가나 가곡이 아니면 부르지 않았었다. 유행가를 듣는 것조차 금기시했던 집안 분위기에서 소위 ‘뽕짝’ 노래를 부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텐데, 어린 딸에게 대중가요를 가르쳐 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엄마는 늘 내 소풍을 따라다녔다. 어느 해 소풍날, 급우들이 합창으로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그 노래를 몰랐던 내가 부르지 못했던 건 당연한 일. 멍하니 앉아 있는 딸의 모습에 열 받았던 엄마는 그 날 저녁부터 종이에 가사를 적어가며 내가 달달 외울 때까지 가르쳤다. 그 덕분에 <동백 아가씨>는 지금까지도 한 소절도 틀리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애창곡이 되었다.

사실, 내가 동백꽃을 가까이서 본 것은 여고를 졸업한 직후였다. 상급학교 입학식을 기다리고 있던 겨울 어느 날, 여수에서 서울로 유학을 왔던 여고 동창에게서 자기 집에 놀러 오라는 편지가 왔다. 그때 멋모르고 찾아갔던 그곳에서 숲길을 온통 뒤덮고 있던 붉은 꽃들을 보았다. 땅에 떨어져 있던 꽃송이들이 하도 싱싱해 보여서 누군가 일부러 꺾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 속이 서늘해졌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백꽃은 지는 모습이 참 특이하다. 낙화를 거부하는 추태는 절대 보이지 않으려는 단호한 모습으로, 절정에 이르렀을 때 눈물처럼 후드득 떨어지는 꽃. 마치 은장도를 꺼내 스스로 정절을 지켜낸 여인의 모습처럼, 생생한 모습으로 떨어지며 생을 마감하는 꽃. 그 모습이 너무 처연해서 무수한 시인들이 다투어 동백꽃을 노래했던 걸까.

어느 시인은 동백꽃을 ‘지상에서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뜨거운 술에 붉은 독약 타서 마시고/ 천 길 절벽 위로 뛰어내리는 사랑/ 가장 눈부신 꽃은/ 가장 눈부신 소멸의 다른 이름이라’고 절절한 시어(詩語)로 표현했지만, 가수 이미자 씨가 부른 <동백 아가씨>만큼 뭇사람의 마음을 울린 노래가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혼자 이 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옛 기억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내 기억 속에서 엄마와 나는 늘 아버지를 기다렸었다. 부산에 있는 공장에 간다며 집을 자주 비웠던 아버지, 서울로 돌아올 때마다 한 아름 선물을 안겨 주었던 자상한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 뒤에 숨겨져 있던 얼동생들의 이름이 호적에서 발견하기 전까지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어린 시절,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서 철없이 불렀던 <동백 아가씨>. 남편의 모습을 쏙 빼닮은 딸의 노랫소리가 젊은 여인의 가슴 속 서러움과 슬픔의 덩어리를 얼마만큼이나 삭혀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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