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그레이 칼럼] 세월따라 변한 마을 페어홉


앨라배마 남쪽, 바닷가 마을 페어홉은 예술가 타운이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기후가 원만해서 많은 작가와 화가들이 정착해서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했다. 중심가 곳곳에 핀 아름다운 꽃들이 한 집 건너 있는 갤러리와 스페셜티 스토어들과 묘하게 어울리며 서로의 아름다움을 북돋우는 흥미로운 지역이다.

사철 많은 문화행사가 열리지만 1월은 좀 한가하다. 새해맞이로 그곳에서 며칠 지내면서 겨울 운치를 즐기려고 페어홉을 찾아갔다. 들릴 적마다 독특하고 재미난 가게들을 찾아보고 책방을 겸한 커피숍에 쉬면서 지역인들의 여유를 즐기는데 이번 방문에서는 평소 내가 좋아하는 몇 가게의 변화에 하늘에 낮게 드리운 구름이 내 마음에 들어섰다.

좋아하는 화가 크리스틴 린슨의 갤러리에 들어서서 달라진 분위기에 당황했다. 그녀의 흔적이 지워졌다. 선이 굵은 그림들이 벽들을 장식했고 둘러봐도 그녀의 다정다감한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서 액자를 끼우는 남자에게 물었더니 자신에게 갤러리를 팔고 떠난 그녀의 근황은 모른다고 했다. 헌츠빌에 있는 연구소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그만두고 페어홉에 왔다는 남자는 그림을 좋아해서 갤러리를 샀다며 밝게 웃었다.
그녀의 그림을 원하면 구해 주겠다던 남자의 화랑을 나오면서 왠지 옛친구를 잃은 기분이었다.

다음에 들린 앤틱 스토어에서 다시 썰렁함을 느꼈다. 밖의 날씨처럼 내 마음의 기온도 내려갔다. 마치 잘 어울리는 견과와 과일 같은 독일계 아내와 영국계 남편 노부부가 보이지 않았다. 볼 적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었던 그 부부를 카운트를 지키는 여자에게 물었더니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가게의 독특한 물건과 함께 톡 튀던 성품의 재미난 부부가 늘 그대로 있어 주길 바랬던 내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아기자기한 앤틱 스토어 한 부스의 선반 위에서 나를 반긴 영국산 도자기에 탄성이 절
로 나왔다. 올드 컨트리 로즈 디자인을 가진 상아색 찻잔 세트가 우아한 고전미를 뽐냈다. 조심스럽게 찻잔을 이리저리 돌려 보면서 세월의 흔적을 따랐다. 언제 미국으로 건너왔는지 또 이 날렵한 찻잔을 사용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궁금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았던 도자기에 새겨진 꽃송이가 여전히 은은하게 빛나며 새로운 주인을 찾았다.

어쩌면 오래전 유럽에서 건너온 개척인이 살림살이로 챙겨온 물건인지 모른다. 사바나 항구에 도착해서 남부에 정착한 가정에서 사랑받았던 물건이었을까? 오후 티타임에 산뜻한 샌드위치와 함께 손님을 대접하는 찻잔이 놓인 테이블에 내가 앉은 착각이 들었다. 잠시 감각으로 즐기던 찻잔을 선반 위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요즈음 머그잔으로 커피를 마시는 버릇에 고풍스러운 찻잔 세트를 집에 데려가기 망설였다. 난 살림을 줄여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나에게 일어나는 세월의 변화도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 겸 베이커리는 간판은 그대로 있는데 가게 문은 닫혀 있어서 호텔 프런트 직원에게 물었더니 오랫동안 지역의 명물이었던 가게는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곳으로 최근에 옮겼다고 했다. 다니며 출출하면 들리던 맛집이 없어졌고 눈요기하던 갤러리가 변했고 환하게 웃으며 내 보물찾기를 도와주던 노부부가 떠난 페어홉의 거리가 허전해서 다음날 종일 바다를 끼고 있는 한적한 시골길을 혼자 운전하고 다녔다.

도로 양변에 길게 늘어선 늙은 떡갈나무들은 여전히 태평스러웠다. 여기저기 새로 형성된 주택가들이 많았지만, 뒷길은 예전 그대로 한적해서 좋았고 한창 얼굴을 내미는 화사한 목련꽃이 나에게 푸근함을 줬다. 봄의 소식을 줬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새로 들어선 고급 식당들을 찾아서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페어홉 브루잉 컴퍼니 맥주에 푹 빠져서 행복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린 쇼핑센터의 한 가게에서 다양한 머그잔들 사이에 외롭게 버티고 있던 우아한 머그잔이 내 시선을 잡았다. 영국산 ‘빅토리안 크리스마스’ 찻잔이었다. 또 없나 싶어서 두루 살펴봐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주에 찾아온 영국인 둘째 사위가 많은 컵 중에서 그 잔을 집어서 티를 만들었다. 고향을 상기시켜줘서 저절로 손이 갔다고 했다. 내 눈에 띈 머그잔 하나가 사위에게 조그만 기쁨을 줬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듯이 세월에 따라 변하는 당연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니 마음이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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