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얘기] 칼럼을 마치며

코로나로 난리다. 영원히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얘기가 점점 그럴싸하게 들린다.

그런데 얼마 전 재미있는 신문기사가 눈에 띈다. 코로나 이후 긍정적으로 정착될 라이프스타일 10가지다. 거기에 ‘혼자놀기’가 있다. 거리두기가 익숙해져 ‘인싸(인사이더)’ 강박에서 벗어나 ‘아싸(아웃사이더)’ 삶을 즐기게 된다고. 혼자 지내기가 ‘루저’가 아닌 내 삶 즐기기, 곧 ‘나로 살기’의 긍정적 습관으로 바뀐다는 얘기다. 지긋지긋한 코로나가 좋은 영향도 있다니 얼핏 노자의 가르침 ‘유무상생’ 처럼 들린다.

그리고보니 지난해 칼럼을 시작하며 던진 화두가 ‘나를 찾기’와 ‘나로 살기’였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알고 있는 내가 나인가? 누구나 삶에서 이 질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만큼 풀기 어려운 문제도 없다. 그러니 한두 번 고민하다가 포기하고, 때로는 종교에서 내 ‘바람’의 답을 찾는다.

슬프지만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모른다. 어디서 와서 지금 왜 여기에 있는지 모른다.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그저 생각 또는 육체와 동일시하고 세상을 살다간다. 그런데 사실 이 어려운 질문에 답한 사람이 있었다. 붓다와 예수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는 그들의 사상을 계승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곧 영적 스승들이 있다. 영적 사상은 예수와 붓다, 그리고 수많은 영적 스승들의 얘기이며, 형식으로 본질이 가려진 종교와 달리 삶의 진리만을 추구한다.

영적 사상에서는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은 ‘진정한 나’를 몰라서라고 말한다. 거꾸로 말하면 진정한 나를 알면 삶의 고통이 모두 사라진다는 얘기다. 내가 대단한 존재임을 모르고 ‘가짜’를 ‘진짜’로 알고 고통 속에 산다는 얘기다. 가짜는 뭐고 진짜는 뭘까?

가짜 나는 ‘에고(ego)’다. 나라고 추정하는 ‘생각의 집합체’요, 생각과 감정, 직업과 소유를 나라고 여기는 ‘착각’이다. 살아온 배경에 따라 끊임없는 내 머릿속 목소리를 들으며 생긴 ‘허구의 정신적 이미지’가 에고다. 이 이미지가 판단하고, 비교하고, 불평하고, 명령한다. 에고는 사라진 과거와 있지도 않은 미래 속에서만 산다. 늘 과거를 떠올리고 후회하고 원망하며, 오지도 않은 미래의 불안에 떨게 한다. 만약 내가 과거와 미래 속에 산다면 가짜 삶을 살고 있다는증거다.

한편, 생각의 흐름 바탕에 그 생각들이 생겼다 사라지는 무한한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이 진짜다. 내 ‘본질’이다. ‘순수한 존재’요 ‘순수한 있음’이다. 평소 에고에 가려있던 본질은 이웃을 사랑할 때,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때 잠깐씩 모습을 드러낸다. 사랑과 아름다움은 내 본질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본질은 오직 ‘이 순간’에만 살아있다. 있지도 않은 과거와 미래에는 본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로 살기는 뭔가? ‘어마무시한’ 내 본질을 알아차리고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살기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이 순간을 살기다. 잠시의 행복이 아닌 저절로 샘솟는 기쁨과 평화로 살기다. 나와 네가 아닌 ‘우리’의 삶을 살기다.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살기다. ‘삶 상황’이 아닌 ‘삶 자체’를 살기다.

때때로 자신을 들여다보자. 반드시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내 삶의 주인으로 살자.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내면의 자유를 누리자. 나만의 창조적 삶을 살자.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극복의 삶을 살자. 단순하고 편안해지자. 세상을 즐기고 실컷 놀자.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그리고 세상을 위해 할 일을 생각해보자. 사랑은 모든 생명체가 하나임을 느끼고 껴안기다. 그들을 사랑하자. 적을 사랑하면 적이 없어진다. 진실하고 바르게 살자. 진리가 나를 돌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깨어있는 ‘마음챙김 (mindfulness)’, 에고를 알아보는 ‘알아차림 (awareness)’을 시도해보자. 삶에 저항하지 말자. 집착하지 말자. 따지고 보면 모두 지나가는 ‘쇼’다.

마치기 전 죽음 얘기를 살짝 해보자. 죽음은 ‘삶 마무리’다. 죽음은 삶의 일부요,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좋은 삶’은 ‘좋은 죽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필히 죽음을 알이야 한다. 알아야 당당하게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피하고 모르는 사람은 겁먹고 당황한 채 삶 마무리가 생략된다. 좋은 죽음이 뭘까?

오래전 고승들은 때가 되면 스스로 보따리를 꾸려 깊은 산속으로, 먼바다로 혼자 삶 마무리 길을 떠났다. 산속을 거닐며 광활한 바다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죽음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니체가 얘기한 ‘능동적 죽음’도 같은 맥락이다. 노후에 남에게 의지하기 전 자기 의지로 삶 마무리 방법을 찾기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죽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오래된 TV 브라운관이 수명을 다해 마지막 한 줄기 빛이 ‘팍’하고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죽고 나면아무것도 없단 얘기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그저 육체는 썩고 유기물 C(탄소), H(수소), O(산소)로 분해되어 원래 모습, 곧 흙으로 돌아간다는 얘기다.

영적 사상을 접하고는 다른 ‘옵션’이 생겼다. 어쩜 본질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주(또는 신) 안에서 건재할지도 모른다. 생전에 행한 ‘업(카르마)’에 따라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겠다. 티벳 불교의 리더 ‘파드마삼바바’의 전설의 경전 ‘티벳 사자의 서’는, 죽는 순간 에고에 가려 숨어있던 본질이 새로 태어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다소 으스스하지만 아주 구체적으로 윤회를 설명한다.

영적 스승들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늘 깨어있으라’다. 가능한 내 본질과 함께하란 얘기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항상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나서자. 가끔 내 안의 본질과 함께함으로 담담하게 삶의 능선을 넘어보자.

6개월가량 부족한 글이 독자들 ‘내적 여행’ 흥미의 불을 지폈다면 영광이다. 늘 가슴에 새겨있는 문장으로 ‘삶 얘기’를 마친다. 영적 스승 ‘에크하르트 톨레’의 육성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을 즐기고, 그 세상과 더불어 놀고, 새로운 형상을 창조하고(자아실현), 삼라만상의 아름다움에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 무엇에도 집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습니다”



정승구 칼럼니스트 / 전 언론인 기자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오늘의 핫이슈

Video News

핫딜 더보기

이 글을 공유하려면 링크를 복사하여 붙여넣으세요.
복사를 누르시면 자동 복사 됩니다.